이혜승의 작업실에는 대학교 때부터 가장 최근작까지 작품들이 모두 모여있다. 캔버스를 하나씩 살펴보면 그려지는 대상이나 풍경은 화면마다 달라지지만 25년 전의 작업과 지금의 작업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긴 시간을 관통하는 그만의 작가적 관점이 뚜렷이 자리잡고 있다.
이혜승이 끊임없이 탐구하고 그려온 것은 실내외를 아우르는 풍경이다. 어디론가 이어지는 계단이나 문, 실내의 창을 통해 보는 바깥 풍경, 거대한 산으로 둘러싸인 길, 모호한 수평선의 바다 등 특정 장소를 그렸다기보다, 나도 한번쯤은 보거나 경험했을 듯한 풍경이 빠른 필치로 그려져 있다. 꼭 ‘그’ 창문에서 보이는 나무나 해질녘의 ‘그’ 길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어딘가를 보며 느꼈을 마음의 안식, 소통의 욕구, 외로움, 사색 등의 다양한 심리적 상호작용이 화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공간’의 사전적인 의미는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범위, 어떤 물질이나 물체가 존재할 수 있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자리’라고 한다. 캔버스 속 풍경과 대상들은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드러내기보다 마치 무대의 배경처럼 ‘공간'이 되어 각 개인의 내러티브와 심상이 무대를 채울 수 있도록 그 가운데 자리를 내어준다. 한번에 파악되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 두고 볼 수록 발견하게 되고, 우리의 손을 이끌어 스스로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게 하는 작품 속의 이 힘이야 말로 이혜승이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매달려온 작업의 근간이다.
이러한 힘 혹은 세상을 해석하는 작가만의 관점은 열 살부터 십대 시절을 보낸 제주에서의 삶에 뿌리내리고 있다. 한국이지만 한국인 것 같지 않은 제주의 풍광과 낯선 환경에 새로이 적응해야 했던 이 시기는, 새로운 환경에의 경험을 온전히 흡수하지도 완전히 밀어내지도 않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방식으로 소화하는 그만의 전형적인 태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이혜승은 서울, 프랑스, 영국, 노르웨이 등을 오가며 이질적이고 새로운, 한편으로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풍경들과 자신의 내적 태도가 조우하는 무수한 순간들을 사진이나 기억으로 남기고 켜켜이 내면에 쌓아 왔다. 이렇게 축적된 내면의 풍경에는 장소나 시간, 대상에 대한 정보와 의미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혜승의 풍경과 대상이 각 개인 의 마음 속 사적인 장소, 시간 그리고 심상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다.